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좋다'를 몇번이고 말하던 j씨가 갑자기 심각하게 물어왔다. 이 좋은게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고, j씨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이 시간이 좋게 느껴지지 않게 되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 묻는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몸을 돌려 j씨를 꼭 안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담백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같이 해서 좋은 걸 찾으면 되지. 우리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을 딱히 가진게 없고, 보통의 연애하는 사람들처럼 매일매일 만나 데이트를 하는것도 아니고, 통화로 몇시간씩을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서도, j씨와의 시간이 벌써 꽤 많은 년수를 더해가는 동안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j씨와 감성적이고 꿈을 꾸던 내가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이들이 보기에도 ..
겨울이 가고 봄이 온 양 따뜻하다가 도로 추워져 목 안쪽 깊숙한데를 간지럽히는 날씨에 봄이 아닌 가을을 지나온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도로 겨울인가 싶어지지만, 흐린 날씨에 눈이 아닌 비를 쏟아내는 날씨에는 아직도 가을인가 싶기도 하고. 내일부터는 꽃샘 추위라고 아침 방송에서 하던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럼 한동안 추웠던건 대체 뭐였지. 추운거에 좀 더 약한 나는 남들 봄옷 입고 다녀도 꿋꿋하게 모자에 털이 수북한 후드 점퍼를 입고 다녔었더랬다. 그다지 해를 볼일이 없던 요 몇일의 흐린 날들 속에서는 쇼팽을 들었다. 가끔은 바흐가, 가끔은 쇼팽이, 가끔은 피아졸라라던가가 번갈아가면서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기호에 대해 살짝 고민하지만 답은 없으니 접어두고. 아침의 모닝커피로 이천원에 판다던..
쉬던 자전거 타기를 도로 시작하고는, 쉬던 바디 로션을 도로 잘 보이는 곳으로 당겨놓는다. 아침에는 꼭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아야 한다. 덕분에 샤워를 하루에 꼬박 두번씩 챙겨하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겨울이면 건조해 어쩔줄 모르는 피부를, 생각날때 오일이나 바르며 방치해두고 있었다. 자기전 운동과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를 하고, 나이트용 바디 로션을 바르고, 베개에는 라벤더 오일을 두어방울 떨구고 얼굴을 묻어 잠이 들었다. 마시는 커피의 농도와 양이 늘어나고, 평균치 두통이 가실 줄을 모르던 몇 주 중 모처럼의 숙면이었다. 이도저도 다 귀찮아 운동도 그만 두던 지난 겨울엔 나도 빈둥빈둥 놀 수 있는 사람이라는걸 깨닫게 되었더랬다. 시작은 그렇게나 어렵더니, 하고 나니 별 거 아니었다. 그리고는 그만 해..
...하여튼 본론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로린과 스타샤를 비롯하여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당신 주위의 광범위한 사람들이 더러는 고상하게 잘난 체 하며, 더러는 짐승처럼 (그러나 정작 짐승은 실제로는 그러지 않죠) 어리석게, 또 더러는 악마처럼 선심을 쓰는 체 하며, 사람을 죽이는 애정으로 당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나는, 밀레나, 당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최후의 모든 점까지 알고 있습니다. 설사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이 빈에 머물러 있든, 프라하로 오든, 혹은 프라하와 빈 사이에서 부유하든, 혹은 이런 일을 하든, 혹은 저런 일을 하든 말입니다. 이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면, 도대체 당신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카프카
못해도 석달에 한번은 시간을 내고 기운을 내서 정리를 한다. 오늘의 정리는 주방쪽. 얼마전에는 타일까지 비누칠 해 닦아내고 샤워기로 물을 뿌리면서 즐거워하던 - 제일 좋아하는 - 욕실 청소를 했었더랬다. 찬장을 열어 빼곡히 쌓여있는 것들을 다 꺼낸다. 방마다 차곡차곡 식량 쟁여놓는 개미나 다람쥐 같다고 진지하게 말했던 엄마의 습성을 어느정도는 닮은 덕분인지 마트만 가면 사다 놔야할게 보인다. 잔뜩 사다놓은 것들은 찬장과 냉장고에 들어찬다. 야채칸은 박스 포장 되어있던 과자들이 낱개로 가득하고, 냉동실은 고기라던가 떡이라던가 파, 마늘, 고추 같은것들이 들었다. 아, 쥐포도. 사다놓고 쟁여놓고 이걸 다 먹어치우면 문제가 없는데, 그게 아니라서 문제가 되는거지. 혼자 살면서도 냉장고와 찬장만은 가득 채워놓고..
1. 생각이 많다. 생각하던걸 포기해버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시작하니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이 결론을 향해 가는 절차에 대한 부담감이 크다. 무언가에게 내가 소비되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질머리는 이런데에 안 좋은 방향으로 쓰인다. 절차에서 소모 될 감정들이 생각만으로도 벌써 지친다. 그래서 사실 아무하고도 상관하지 않고 사는 삶을 바랬다. 모든 것의 끝은 아무리 좋게 오던 나쁘게 오던 서로를 갉아먹는 절차를 꼭 밟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상관하지 않는 삶을 바라려면 전부 버리고 상자 안에만 들어있어야하기 때문에, 그 상자에 들어갈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에 - 혹은 자신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온전히 혼자일때가 편했다, 내가 무슨 결정을 하던지 그건 나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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