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있을 공연이 갑자기 생각나 밤청년들의 노래를 틀어두고 나갈 준비를 한다. 환기를 한번 할까 했지만 이것저것 정리하다보면 오전중에 나가기가 힘들 것 같아 일단 미룬다. 안과를 가려고 집을 나서니 자잘한 눈이 흩날렸다. 잠깐 고민했지만 세탁하고 올해 처음 입은 점퍼라 5층으로 다시 올라가 우산을 들고 내려왔다. 큰길로 나오니 다들 우산이 없어 모자와 옷깃을 여미고 종종 걸음을 걷는다. 턱을 떼지 말라며 간호사가 지그시 뒷통수를 손바닥으로 버텨주는 동안 자잘하고 따끔하게 속눈썹들이 뽑혀 나갔다.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며 적외선 램프 앞에 잠시 눈을 감았더니 뜨끈뜨끈한 기운이 느껴져 두툼한 옷이 답답했다. 시장의 두부집은 첫 두부가 그렇게 일찍 나오지 않았던 기억이라 병원도 겸사겸사 게으름 피우다 늦게 나..
11월과 12월은 들숨과 쉼으로 지낸다. 가쁘게 내뱉던 것을 가다듬고 찬찬히 들이 마시고 있다. 집에 앉아 연하장 대신 쓸 달력을 만들고, 연간 행사로 작업하고 있는 다른 달력도 하나 더 만들고, 엄마의 예전 사진들이 담긴 앨범을 만들고, 일감이 하나 생길 것 같아 업체 미팅을 준비하고, 어느 날에는 침대에 꼼짝을 않고 앉아 책을 읽다가, 찬 바람에 덜덜 떨며 환기를 하고, 웅크린 고양이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6시간마다 15분씩 돌아가는 보일러가 작동할때는 덥다가 쉴때는 춥기도 하고. 이런저런 저런이런 날들. 어제는 왠일인지 평소에는 잘 들여보지 않던 시집 코너에서 서성이다 책을 한권 펼쳤다. 펼친 면의 시가 단번에 마음에 들어 사야겠다 마음먹었지만, 약속도 남아있고 매고 있는 가방은 작은 크로스백이라..
겉절이를 하려고 이것저것 재료를 담는다. 시장에 들러 배추를 한 통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돌아올까 했지만 귀찮다며 사오지 않을 확률도 절반 쯤은 되니 온라인 장바구니를 이용한다. 지난주부터 먹고 싶었던 미역국을 끓이겠다고 국거리도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한동안 먹을 장조림도 할 겸 해서 사태도 큰 덩어리를 사뒀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준비해야겠다. 겉절이를 하겠다고 했더니 주위에서 묻는다. 그거 할만해? 그래서 답했다. 안 해봐서 몰라. 아하하. 인터넷에는 레시피가 많고, 나는 적당히와 대충 계량의 정도를 걸어 그럴싸한 맛에 도달하는 사람이니 어떻게든 되지 싶다. 될거야. 오사카에서 땀을 뻘뻘 흘렸던게 열흘도 안됐는데 돌아오는 날부터 싸늘하던 바람은 점점 차진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추위를 ..
엘리베이터는 한참을 올라가다 환한 곳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케이블카 모드로 전환되었는데 속도는 여전히 엘리베이터라 공포에 질렸다. 애써 밖을 보지 않으면서 애쓰다 도착지에 도착하고 나니 전달해야 할 물건을 들고 오지 않았더라. 으으, 하고 신음을 뱉으면서 돌아가니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출 발 전 위치를 알려줬던 안내원이 왜 이건 챙겨가지 않았냐는 듯 물건을 내밀었다. 도착한 곳은 허름하고 오래 된 여관 같은 곳이었는데 안은 너무 넓어서 내가 들어갔던 문은 뒷문이었지 싶다. 마침 근처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목적지를 물으니 찾아야 하는 곳은 저 안 깊숙한 곳에 있다며 여기서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올라가서 헤맬테니 안쪽에 가서 올라가자고 앞장섰다. 안쪽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자 마치 캣워커 같은 길들이 이어져..
그동안 해 온 프로젝트들이 빼곡히 들어 찬 이력서를 정리하다보니 열심히 살았구나 싶다. 일정은 좀 꼬였지만 그래도 곧 이천은 끝이 날테고, 다음 프로젝트는 기약이 없지만 '그래도' 또 일은 생기겠지. 타고난 일복 덕분인지 일만큼은 끊이질 않아 사실 그 부분에는 걱정이 없다. 이 '일 복'에 관해서는 복은 복이지만 많은게 절대 좋은 것은 아닌게, 결혼하고 6년이 다되도록 둘 다 프리랜서인데도 전혀 프리하지 않아 같이 쉰 날이 거의 없다. 놀면 수입이 제로니 맘 편히 놀지도 못하고 어영부영하다 다시 프로젝트를 구하기를 매번 반복 하는 와중에 남들 다 있는 여름 휴가 마저 없는 경우가 많아 같이 어딘가 놀러가서 좀 쉬고 싶다. 같이 갔던 '여행'은 제작년인가 뱃부 다녀온게 끝인 것 같은데, 혼자 다니는것도 좋..
내가 싫어하는 것들 중에는 닥치면 생각해 보자는 불확실한 예정과 타의에 의한 계획 변경이 있는데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아, 아무리 봐도 속이 빤히 보이는데 대놓고 말은 못하고 끝까지 자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구는 상대방도 있으니 세 가지 일지도. 사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그만두거나 조정을 해서 빠른 시간(시일X) 안에 해결하고는 하는데, 일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내 손을 떠나고도 피드백이 없는 시간이 너무 길다. 덕분에 고양이 목에 방울기를 서로에게 떠밀고 있는 꼴을 보고 있는 j씨와는 서로에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 따위 일 그만 둬도 된다 - 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일은 그만두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다. 이 무더운 현실 같으니라고. 그 와중에 오늘 아침엔 자신의 잘..
새벽 공기가 더는 뜨겁지 않고, 버스는 여전히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틀고 있어 점심 시간과 퇴근 시간을 빼고는 더운 줄을 모른다. 가방이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여름 내내 버티고 버티다 큰 감기의 조짐이 있어 살짝 두툼한 숄을 가방에 넣었다. 가디건을 입고 분홍과 초록색의 숄을 패셔니스타 미라처럼 둘둘 말고 통근 버스에서 잠이 들기를 며칠, 이제는 사무실도 춥다고 흔들 의자에 뜨개질 옵션이라도 따라올 듯 내내 어깨에 숄을 두른다. 덥지만 추워 추위가 다시 오길 바라야 하는 건지, 계속 덥길 바라는건지 잘 모르겠다. 한동안 쉬었던 운동을 다시 해야하는 필요를 온 몸으로 느낀다. 언제나 할 일은 많고, 할 맘도 많지만 의지가 없지, 의지가. 한동안 SNS와 메신저가 뜸했다. 별다른 마음의 일이나 육신의 일이 ..
노 맨즈 스카이라는 신작 게임을 보고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게임은 아마 멀티 플레이가 필수 일거라는 이야기에 마음을 접었다. 온라인 게임을 안하는 이유가 남들과 게임하기 싫어서인데, 광활한 우주에 홀로 남아 자원을 모으고 우주선을 만들어 다른 행성으로 옮겨 다니는 게임에서 다른 사람과 협력이라니 이게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나의 노는 시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경쟁이나 협력을 요구하는건 마치 오늘은 집에서 뒹굴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누군가 찾아와 세차게 문을 두드리며 혹은 문을 따고 들어와 뒹구는 것을 함께하거나 경쟁하자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 싫단 말이다. 엉엉. 다시 찾아보니 게임 타이틀에 적합하게도 싱글 플레이만 가능한 게임이라 안심했지만, 그래픽이 영 흡족하지 않아 또 마음에서..
결혼을 하고 1-2년은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 계획을 물었고 대충 넘기고 넘기다 보니 다들 뜸해져서 안심이었건만, 나이를 먹고 6년차에 들어서고 주위에 아가들이 늘어나니 다시 슬슬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언젠가부터는 생기면 낳겠다는 답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런 나를 보며 e언니는 백프로 원하지 않으니 생길리가 있나를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에게 백프로는 영영 오지 않을텐데 어쩌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의 말대로 낳으면 내 자식이니 어여쁠테고, 피는 물보다 강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닐테니 아마도 괜찮겠지만 그 '아마도'가 문제인거겠지. 굳이 따지자면 임신과 육아, 아이에 대해 무감각한 편이라 좋지도 싫지도 않은 그 것에 내 인생을 실을 자신이 없는 것이 맞을거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생..
어젠가 엊그제 꿈에서는 출근 버스에서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 급하게 내렸더니 저 앞에 바다가 있었다. 건물들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바다를 보며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츨근을 위해 바로 앞의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더랬다. 그리고 오늘의 바다는 좀 더 가까웠다. 한쪽 방 큰 창문을 열번 바로 바다 물이 찰랑였다. 창틀에 올라 앉아 발을 아래쪽으로 쭉 뻗으면 발 끝에 물이 닿았다. 오키나와와 제주에서 봤던 남색과 옥색의 물. 갑자기 내리는 많은 비에 방 안으로 몸을 들이고 비가 오는걸 보고 있자니 옆에서 누군가 바다는 비가 와도 넘치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별로 불안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다. 손으로 쓰다보니 영 지저분 한 것이 성에 안 차서 컴퓨터 앞에서 정리를 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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