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겨울을 보낸다. 찬 바람에 눈 냄새가 났다. 밟히는 눈이 점점 두께를 더했고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으려 종종거리며 걸었다. 새로 산 우산에는 금새 수북히 눈이 쌓였다. 눈싸움을 하러 나온 아이와 아빠를 지나 집으로 들어가기 전 다 가리지 못한 몸에 쌓인 눈들을 팡팡 털어낸다. 이상하게 바쁜 12월이라 올 해도 다 지났구나에 대한 감상도 없이 시간이 흐른다.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나쁘지 않은 기분. 차근차근 깊어진다. 올해의 목표는 작년과 같이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다정함은 없이 그저 깊어지기만 했다. 그렇다면 내년의 목표는 아마도 '여전한 깊음'이지 않을까. 아, '평온한 침잠'이 좋겠다. 그거면 충분하겠네.
자그만 어항에 살고 싶다 했더니 작은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집을 한채 건네받았다. (나는 항상 건내와 건네 사이에서 망설이고는 한다) 저 조그만 구멍으로 저 작은 것들이 차곡차곡 들어가 쌓여 모양을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감탄스러워 잘 보이는 곳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크고 광활했던 꿈은 나이를 먹으며 작아졌지만 그것에 서러웠던 적은 없었다. 나의 만족은 오히려 작은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작은 삶을 살고 싶다. 작은 집과 작은 마당, 작은 만남들과 작은 날들. 작은 것들이 모여도 여전히 작지만, 작은 만큼 단단한 그런 삶.
이미 펀딩이 완료된 텀블벅의 제작자에게 디엠까지 보내며 구한 활자 일력. 이 어여쁜 걸 구할 수 있게 되었다며 자랑했더니 m이 '생선'으로 멋지게 결제해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고양이 수발들러 와준 ck가 얌전히 식탁위에 모아 준 택배 안에 있어 요리조리 살펴본다. 하루하루 뜯어내기 아까울 정도로 어여뻐서 뜯어낸 것으로는 무얼 해야할까 고민 중이다. 그나저나 내년 달력은 대체 언제 만들지. 시간은 잘도 흘러가는데 이상하게 바쁜 겨울이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정리를 거의 다 마쳤다. 뭐든 시작하면 빠르고 급하게 해치워야 하는 성질 머리는 내가 주체가 되지 않으니 얌전히, 나올 생각을 안한다. 덕분에 시간을 들여 천천히 조금씩 없애나갔고,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상태.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는 건 아니지만 모두 이고지고 살아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상 예쁜 쓰레기는 조금만 들고 살기로 했다. 집을 비우기 전 마무리 청소와 환기를 한다. 고양이들을 위해 보일러의 온도를 잘 맞추고 외투를 든든히 입고 나면 준비 끝. 날이 너무 추워 곧 따뜻한 곳으로 간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나무 선인장은 약속이 있을때도 평소에도 종종 들른다. 인스타에서 메뉴 확인을 먼저 하고 가기로 결정하고는 하는데, 간고기 토마토 카레는 아직도 못 먹어봤다. 입이 짜도 카레는 듬뿍듬뿍 떠먹는게 취향이라 갈때마다 카레만 리필 받고 있다. 어제도 j씨에게 카레가 먹고 싶다고 말하다가 그냥 사먹으면 되는구나 하고 깨달음. 동네에 카레집이 있는게 오랜만이라 아직 덜 익숙해졌다. 오꼬노미야끼와 야끼소바를 먹었던 명동 후게츠. 먹는 낙 뿐이라는 나의 투정에 한동안 j씨가 맛집 찾느라 고생 좀 했다. 정통 오꼬노미야끼 전문점이 없으니 거기에 점수를 주고 시작하지만 맛은 평범한 편. 오사카 기준으로 하면 키지보다는 치보에 가까운 맛 - 인데 오꼬노미야끼가 특별하게 맛있기가 어렵기도 하고, 생맥주의 맛이 심하게 차이 나..
정신을 10% 정도 놓고 다닌 듯 미묘한데서 자꾸 어긋나서 결국 한강을 하루에 4번 봤다. 강을 건너 도착한 지하철에서 내려 냉큼 올라 탄 버스가 다시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는 아침에 있었던 자잘한 사건들까지 떠올리고 모든걸 포기했다. 인자한 표정으로 택시에 올라타서 언제나 하는 말을 외쳤다. 택시 타려고 돈 벌지 내가. 짧은 만남도 긴 만남도 그저 즐거운 우리는 재잘재잘 잘도 떠든다. 내내 같이 살다시피했던 오래 전과는 달리 지금은 자주 만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고마운 우리. 마음이 좋아지는 사진 둘. 주일학교 유치부 선생님으로 다져진 성대가 꼬꼬마를 대할때는 평소와는 달라서, 캐리 언니에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캐리 언니는 예쁜 얼굴을 온 세계에 뽐내야 하잖아. 안될거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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