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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선유도

_e 2011. 3. 21. 21:52


숙소 예약도, 평소처럼 손에 한 가득 장 본 먹을거리도 없이 준비한거라고는 떠나는 버스표 뿐이었지만, 발걸음도 가벼웁게 - 잘때 입을 옷이랑 화장품 조금, 카메라 몇개 들고 길을 떠났다. 먹을 걸 안 가리는 우리니까 첫끼니는 역시 밥이라며 순대국밥을 한그릇 먹어치우고, 울렁거리는 배에서 한숨 더 자고는 선유도에 도착. 우리를 맞이하는 아줌마의 손에 이끌려 민박 아저씨께 인양, 전동카트에 몸을 실어 민박집에 도착했다. 뭐 다른데 가야 별거 있겠냐며, 따뜻한 물 나오면 그만이라고 첫번째 본 숙소를 바로 결정하고 추운 몸 잠시 녹이다 밖으로 나섰고, 자전거를 타는 하나와 자전거를 못타는 둘의 걸음이 시작.




지도 앞에서 코스를 정하고 걷는데, 아아아 - 왜 이렇게 아무것도 없지. 겨울이라 스산한 풍경에 인기척이 없는 것 까지 더하니 걷는 둘의 설정놀이 줄거리는 점점 스릴러로 변하고 말았다. 섬에서 섬으로 넘어가는 다리는 높아 고소 공포증이 있는 나는 무작정 한가운데로 숨을 몰아쉬며 걸었고, 윤경씨는 내가 뭔가 무서워 하는건 처음 본다며 나를 비웃었..던건 아니고, 조금 웃었지. 두사람이 걸어야하는데다 바람이 찬 덕분에 자전거를 끌고 나간 윤경씨만 열심히 고생한 덕분에 아줌마가 괜히 이틀에 만원으로 자전거를 빌려준게 아니라며 투덜거리고, 다음날엔 자전거 없이 셋 다 걸었다.



민박집 백반은 고기 하나 없는 나물 반찬 뿐이었지만 나름 맛있었고, 둘째날 회는 우리를 학생 취급해준 아저씨 덕분에 두껍게 썰려 나온데다가 매운탕엔 우럭도 한마리 덤으로 넣어주셔서 더 맛있게 먹었더랬다. 조금이라도 더 얻어먹으려면 학생인 척 해야한다며 정한 우리의 컨셉은 인서울이 목표였지만 이번 수능도 망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하는 삼수생 셋. 슈퍼집 아주머니도 어느 순간 말을 놓으신 덕분에 왠지 돌아갈때 섬에서 나간다고 인사라도 해야할 것 같았지만 막상 떠나는 당일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귀뜸해주신대로 해가 지는 광경은 일품이었고, 해 뜨는 건 당연히 못봤다. 자야지, 무슨 해야 해는. 낮달도 봤고, 반짝이는 물도 보고 그렇게 걷다 걷다 걸으면서 이틀을 보냈다. 그 와중에 감기가 걸린 나는 섬처녀 가슴 설레게 할 잘 생긴 의사 청년을 기대하고 보건소에 들렀지만, 반바지를 입은 곰같은 의사 청년이 부시시하게 방에서 나와 감기약을 불러줬고, 주사도 한대 맞았다. 의사 청년이 이제 우리보다 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깐하긴 했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하면 우리의 정신 건강에 이롭지 못하니 넘어갔고, 왠지 빛 바랜듯 노랗게 보이는 약봉지에 조금 멈칫했지만 진료비에 약값에 주사비까지 다 합쳐도 천원밖에 안하는 보건소의 넉넉한 씀씀이에 이내 괜찮아졌다.



걷고 먹고 자고 다시 걷고 먹으며 신선놀이에 여념없었던 섬에서는 어딜가나 그렇듯 서울로 돌아가기 싫다는 아쉬움을 남겨두고 떠나왔고, 무작정 올라탄 버스에서 아이폰으로 지도를 검색하며 (이 편리한 문명의 이기란, 스마트 폰이 없던 그 시절에 우린 어떻게 살아왔던가) 제대로 도착한 전국 몇대 짬뽕이라는 복성루에서는 줄을 서 기다리고 나서야 짬뽕을 먹을 수 있었다. 이마트를 가면 찾을 수 있다던 철길 마을은 길을 건너 조금 걷자 건물 사이로 있어 금새 찾았다며 깜짝 놀랐고, 기차가 안 다닌 지 꽤 된 덕분인지 메꿔지거나 관리가 안 되어 있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길 따라 걸어 내려오니 둥근 지붕의 위엄을 자랑하는 커다란 웨딩홀이 보여 무사히 버스 터미널에 도착, 떠나려는 차를 급하게 잡아타고 출발, 안녕, 군산.



사진만이 남는거라며 열심히 찍어대는 와중에 나는 땟갈한번 곱게 내주시는 김딧피에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하고 (김딧피가 아무리 밤병신 줌병신이어도 나는 이놈을 끌어안고 평생 살어리랏다) 안드로이드의 카메라360 어플은 성미만 찍었다 하면 후광이 실려 조보살의 전설을 남겼으며, 선유도의 갈매기와 콩눈 개님 등등이 들려주는 육지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소리를 듣고 신기한 섬임을 다시 한번 확신 했다. 다음에는 겨울 말고 봄 여름 가을 중에, 자전거 타고 다시 오자며 그렇게 여행은 끝.




아, 아무리 섬에서 본 사람이 열명이 안되도, 섬에 풀들은 무섭게 다 쓰러져있었어도, 날씨가 추워서 돌아볼 세 코스 중 하나는 포기했어도 - 한적하니 걷기 좋았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었으니, 여행은 역시 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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